간단한 일기
홍대 입구에서 밤에 걷고 있는데 ‘도를 아십니까’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마침 심심했기 때문에’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은 저녁 11시였는데 카페에 가자고 했다.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또는 그 사람에게 쓸 돈은 아까웠기 때문에) 돈이 없고 빨리 가야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녀의 전체적인 인상은 30대 40대 정도의 아줌마였으며 추측되는 나이보다 더 늙어보였다. 왜냐하면 추례했기 때문이다. 옷은 같은 옷을 자주 입는 것 같았으며 겉모습에 신경을 그다지 쓰지 않는 이 시대의 참종교인임을 확신하였다.
해제
해제는 GPT가 작성했습니다.
이 글은 대순진리회라는 종교 단체의 구조와 운영 방식, 그리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구속 메커니즘과 비즈니스 모델(BM)의 합리성에 대한 분석이다. 글쓴이는 과거 다단계 조직에 몸담은 경험을 바탕으로, 대순진리회를 일종의 비효율적 다단계 종교 조직으로 파악하며, 그 구조와 운영 논리를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해부한다.
대순진리회의 신도 구성은 사회적 약자와 비숙련 노동자가 주축이며 이들은 인지부조화, 이단관념, 사회적 고립 등 심리적·사회적 통제를 통해 조직 내에 구속되어 있다. 신도들은 자발적으로 경제적 자산을 상납하며, 탈퇴가 어려운 구조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라는 외피를 두른 ‘극단적 영업조직’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글쓴이는 이 조직의 핵심 전략이 전도(포덕)에 있으며, 이는 경제적 관점에서 매우 높은 투자 수익률을 가진 활동임을 주장한다. 전도는 사람 한 명을 열성 신도로 만들 경우 장기적으로 수천만 원 이상의 가치를 창출하며, 이를 위해 조직은 포교 실적에 따라 신도들의 노동을 배치·관리한다.
글은 만약 자신이 이 조직의 지도자라면 어떻게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할지를 상상하며, 포교 전략의 개선, 내부 관리, 조직 성장, 지도자의 윤리와 권력 문제 등을 논의한다. 또한, 종교 조직의 성장과 유지를 위해 실험적이고 효율 중심적인 관료적 경영 전략이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이 글은 종교를 초월해 인간 조직의 구조와 동기, 구속과 합리성, 그리고 권력의 운용에 대해 탐색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대순진리회의 구조
(내 경험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용도로 이 글을 사용할 것이므로 지피티를 쓰거나 과도한 양의 정보를 담는 대신 간단하게 작성할 것이며 자세한 내용은 검색을 하길 바란다.)


긴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내 습성 상 인터넷에 있는 자료를 차례대로 읽어보았다. 그 결과 이 단체는 다단계 종교임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세일즈웍스 코리아라는 다단계 회사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에 비하면 이 다단계 회사의 구조는 대단히 비효율적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운용하면서도 영업 이익은 매우 적다.(PER이 적다?) 하지만 존재 방식에 대한 근거는 가지고 있으며 이것 또한 분석할 것이다.
이 종교에 들어간 신도들은 확실히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사회 취약 계층이고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 계급이 올라감에 따라 아래 신도들을 착취하고 계율을 어기는 경우도 있다. 먼저 입교한 사람이 선각, 늦게 입교한 사람은 후각이다. 선무까지는 연차가 쌓이면 쉽게 올라가는 듯하다. 이들의 포교 방식은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붙잡고 말을 걸어 음료수를 사게 유도하는 방식이다.
구속 전략
이들은 신도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첫번째는 인지부조화이다. 내가 더 많은 자원을 투자했을수록, 나의 이전 판단과 투자한 시간까지 통째로 부정하는 탈퇴를 하기는 심리적으로 힘들어진다. 이들은 실로 많은 자원을 투자하곤 하는데, 상급자에게 돈을 바치기 위해 기꺼이 신용불량자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이단에 대한 특정한 관념적 형상을 강화한다. 실제 사람들이 그러한 모습이 아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대순진리회 교인들에게 모든 사람은 동류이거나 이단 또는 ‘전도해야 할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말과 ‘우리 사람’들이 하는 말은 서로 다른 필터를 통과해 들어온다. 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탈린의 ‘인민의 적’ 개념을 보라.
세번째로, 다른 사람들과의 접속을 차단한다. 동급 교인들 사이에서도 과한 친분이 생기는 것을 막으며 다른 교인들에 관해서는 더하다. 모든 사회 생활이 상급자로 하여금 관리된다. 이러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제도가 새벽 1시 기도와 새벽 7시 기도이다. 이는 종교적 열정이 없다면 매우 많은 돈을 줘야만 할 일이다. 에밀 뒤르케임이 말했듯이 종교는 사회를 숭배하는 것이며 신성한 것에 대한 신념과 의식의 통합된 것이다. 의식을 통해 종교에 대한 믿음은 강화된다. 중국의 열병식, 미국의 스포츠 경기 등.
BM의 합리성: PER 증대
도를 아십니까가 널리 퍼지고 분파 간의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새로운 신도를 모으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힘은 숫자에서 나온다. 이에 따라 기업이라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더 나은 포교 방식을 찾고 인원 당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
포교가 합리적이며 필요한 이유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굉장히 특이하다. 그들이 기초 생활 수급만 받더라도, 아니면 편의점에 나가 건전한 일을 하기만 하더라도 평신도 한 명 당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가 증가할 것이다. 계층을 올라갈수록 위에 상납해야 할 돈이 증가한다. 그러나 국민소득 3만 달러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 일은 최저 시급만도 못하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유가 필요하다. 저 사람들은 왜 무임금으로 길거리에 나가 포교하며 자신을 종교에 헌신하는가? 저 사람들이 일년에 3만 달러만 벌더라도 장기적으로 이득이지 않은가?
유물론자이자 합리주의자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음이 약해졌을 때에 미신을 믿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일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포덕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에 감사해하며, 그런 기회를 잃으면 비통해한다. 실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공사장으로 보내지거나 다른 잡일을 맡는 등 ‘전도’라는 가장 귀중하고 가치 있는 업무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술한 구속 전략을 활용해 신념 체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의외로 이 비즈니스 모델은 작동 가능하며 합리적이다. 입교한 소위 도인들은 사회에서 형성한 재산 전부를 바쳐야 한다. 자본 소득이 노동 소득을 한참 상회하는 요즘, 그리고 정상적인 일터의 경우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신념이 흔들릴 여지가 있으므로 알바와 같은 단기 저임금 일자리에로 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래도 대체할 만한 일자리에 대해 논의해보겠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전재산을 바치고 부모와 자식과 친구를 속여 돈을 빌리며 사채까지 쓴다면 몇 억 정도는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는 그가 투자한 매몰 비용이 되며 인지 부조화를 일으켜 종교에 더욱 헌신하게 만든다.
도를 닦기 위해 기존의 일자리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물론 이들 중 몇 명이나 전문 직종에 필요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선진국 시민으로서 기본적인 인지능력이 필요한 일만 해도 전도의 10배는 벌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일 년에 70명을 입교시키고 그 중에 단 한 명만 열성 신자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경제적 가치는 1억 이상이다. 열성 신자는 훌륭한 무임금 노동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전도는 경제적으로 더 합리적이다.
포덕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이다. 이것 또한 놓쳐서는 안되는데, 집단의 구성원은 노화되고 이탈 인원은 항상 존재하며 승진 적체도 있으므로, 회사를 청산할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새로운 인원이 충원되어야만 한다.
대체할만한 일자리가 만족해야 할 조건: 수익성의 개선 가능성
이 종교에서는 포덕의 실적이 일정 수준 이상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다른 일자리에 돌리고 있다. 그러한 일자리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대체할 일자리는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로 그들의 종교적 열정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비종교인과의 접근은 차단되어야 하며, 길거리 포교보다 수익성이 높아야 한다. 길거리 포교는 영업이고, 영업은 매우 재능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미디어에의 노출을 피하기 위해 법을 어기면 안된다. 또 일자리 수요가 많아야 한다. 그러니까 제조업처럼 고용하는 인원이 많아야 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이것 또한 놓쳐서는 안되는데, 일자리는 포덕(전도)보다도 힘든 일이여야 한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신용불량자이다. 따라서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제한되어있다.
따라서 보이스피싱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배제되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선 콜센터가 있다. capcha를 푸는 서비스와 같이 단순한 인지 작업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배달일 또한 가능하다. 신용불량자도 가능하며 고소득이고 사람과 대화할 일이 잘 없다. 광신자들에게 설파하는 교리는 끼워 맞추기 나름이므로, 제한적으로 배달 일을 허용하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 길거리 F2F 마케팅은 NGO 단체들이 본인의 평판을 많이 신경쓰므로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일부 인원을 취직시켜 투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듯 하다. 물론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안되므로 지점장과의 적절한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따로 일하게 한다던가. 전문 시위꾼도 생각해볼 수 있다.
비즈니스 모델의 실험에 관해, 이들은 수많은 방면으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실험해보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부에서 새로운 정책을 시험할 때에 우선적으로 지방 정부에서 수행한다. 각 방면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특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부 인원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밀착 관리할 수 있으므로 관료적 관리가 매우 유효하다. 최상급자(도장)은 제도나 지시로 하여금 하부 인원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방식까지 미세하게 조정할 권한이 있다. (다른 일반적인 직장은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교주 또는 조직의 최상부 관리자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포교: 확장이라는 목표에 관해
밈(meme)은 확장을 목표로 하는 유전자와 유사한 관념이다. 밈은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거나 죽기도 하며 자연 선택을 따른다. 포교를 잘 하기 위해서 이러한 밈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더 나은 포교 방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당신이 갖은 노력과 권모술수, 그리고 타고난 재능과 함께 종교 단체의 높은 자리에 올라왔다고 하자. 당신은 교리를 상황에 맞게 조정하고, 타 종교 단체를 포함한 각종 이익 집단과 연합 또는 배신하며 조직을 성장시킬 것이다. 당신이 외연적인 확장에만 몰두하다가는 내실이 부실해질 수도 있다. 적절한 관리와 의식(ritual)로 교인들의 믿음을 관리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머릿수는 힘이므로, 정치인과 힘을 합할 수도 있다. 교인들의 이탈률을 관리하는 동시에 집단의 성장을 관리해야 한다. 다른 방면(기업)을 인수할 수도 있으며 조건은 협상해야 할 것이다. 미디어에 어떻게 노출되는지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법적 분쟁이 생기거나 그를 포함한 기타 이유로 미디어에 부정적으로 크게 노출되면 조직의 존재 기반이 흔들린다. 당신은 챙길 일이 몹시 많다.
따라서 포교 방식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하부 조직에서 실험해보는 방식이 안전하다. 당신이 모든 것을 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능력과 열정이 있는 전문가 집단을 구성하는 것은 당신의 중요한 과제이다. 동시에 당신은 전문가 집단이 이상한 마음을 먹지 않도록 관리하고 적절한 보상과 규율을 정해야 할 것이다. 이 방식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경영적 지표와 달리 포교의 성과는 숫자로 즉시 드러나며, 따라서 수치를 통한 실용적인 경영이 매우 가능하다. 영업은 재능의 영역이므로 하부의 일꾼들의 내재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규율이 잡힌 관료적 조직에서 당신은 하부로 효력이 있는 명령을 손쉽게 내려보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
당신은 하부 조직원을 반드시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상부 인원들은 경계해야만 한다. 그들은 당신의 잠재적 경쟁자이며 과도한 규율 준수 요구는 그들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다. 사담 후세인을 포함한 많은 독재자들은 주변 측근들에게 사치를 허용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은 절대 과도한 사치를 부려서는 안된다. 권력은 사람을 악하게 만들곤 한다. 권력 남용을 조심해야 한다.
금욕적으로 살고 다른 인간들을 경계하며 확장에 몰두하다보면 처음의 순수한 마음(만약 있었다면)이 더럽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느낄 수도 있고 말이다. 만약 이 종교의 성장이 그 어떤 개인의 운명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지도자 또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심리적 상태 또한 적절히 관리해야 할 영역의 하나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가 얼마나 될까? 확실한 것은, 세상은 검은색 또는 흰색이 아닌 회색이라는 것이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자신의 명예욕, 탐욕, 종교에 대한 신념과 회의 등이 지도자의 마음 속에 공존할 것이다. 인간은 단순하지만 복잡하다.
사회학부 독자의 리뷰
위 독자는 본인과 대학영어 수업을 함께 수강하였으며 통찰력 있고 공들인 서평을 써주었다. 이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가장 영성적인 인간적 활동이라 할 만한 종교에 대한, 인간의 경제합리성을 전제한 에세이. 교주나 포교사업(?) 관리자의 입장에서, 이들이 영성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은 채’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가정이 없으면 논의가 성립되기 어려워 보인다. 또는, 영성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교주나 관리자에게 영성이 바로 기계합리성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개별 신도들의 합리성을 명확히 개념화하지 않으면 합리성 전제는 위기를 맞는다. 인지부조화는 합리성의 의도되지 않은 결과인가? 말하자면, 인지부조화를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의 합리성(교주, 관리자의 물욕, 나는 이 합리성조차도 비합리적 토대 위에 세워져있다고 보지만)이 다른 합리성(개별 신도들의 물욕)을 집어삼겼다고 해석해야 하는가?
에세이는 research와 다르기에 다른 잣대로 평해야 하겠지만, 본 글은 에세이와 research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어 이 부분에 대해서 논해야 할 것 같다. 사회과학 research에는 명확한 주장과 함께 실증적/경험적 근거가 필요하다. 본고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앞서 언급했듯 “대순진리회 시스템의 성공적인 안착은 하나의 합리성이 다른 합리성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라면, 그 근거를 찾기 위해 포교된 신도들의 인터뷰 자료나 교주의 발화에 관한 담론 분석이 필요할 듯하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학 연구라기보다는 경제학 연구에 더 가까워지긴 하겠다. 사회학과 경제학의 차이는 인간 합리성의 비합리적 토대를 가정하느냐 마느냐이고, 최근에는 경제학도 사회학의 논의를 받아들여 행동경제학 등 대안경제학이 발전하고 있다(서울대에서는 그런 경향을 찾아보기 어렵다만). 여하튼 종교에 대한 에세이나 연구에서는 기계론이나 합리론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버릴 필요가 있지 않나?
총평: 인간을 욕망기계로 보는 관점은 일리 있지만, 모든 욕망을 명예욕, 권력욕, 물욕, 성욕 등 ‘조금 더 익숙한’ 욕망들로 환원하는 관점은 무리가 있다. ex. 남을 돕고자 하는 욕망을 평판을 늘리기 위한 욕망으로 환원하는 것은 (경제학적) 연구에는 도움이 되고 간편하겠지만 플라톤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양한 욕망의 교차를 본다면 더 괜찮은 에세이? 연구?가 될 듯.